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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최초 영구결번

by 최강10번타자 2023. 4. 19.

김영신에 대해서

김영신은 1961년 강원도 원주시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학력은 단계초-원주중-상문고-동국대를 거치면서 1985년 포수로 OB베어스 1차 지명을 받은 선수이다. 아마추어 선수 시절에는 1984년 LA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포수로 출전하는 등 유망주로 손꼽혔다. 상문고와 동국대를 거쳐, 1985년 OB베어스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김경문, 조범현 등 주전 포수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후 1986년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법곶 3리 앞의 한강 하류에서 익사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부근 경계 초소의 초병이 발견하였다. 경찰 수사 결과 익사체의 신원은 김영신 선수였다. 성적 부진을 비관하여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자살로 결론이 났다. OB베어스는 김영신 선수의 영결식을 치르고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김영신선수의 등번호인 54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는데, 이게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이다. 최고의 유망주였으나 주전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서 자신의 성적과 신세를 비관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비운의 선수이다. 그때 당시에 '트레이드'가 활성화됐다면 OB베어스가 아닌 다른 팀에서 엄청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때 당시에는 트레이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선수가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하거나 하는 등 트레이드가 이루어진 사례도 굉장히 드물다. 결국 김영신선수의 비극적인 죽음은 KBO리그 내 선수 트레이드 활성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으로 꼽히도 한다.

 

비슷한 결번 사례

찾아보니 비슷한 결번사례가 있다. 2010년 2월 미야코지마 스프링캠프 숙소에서 추락사한 오릭스 버팔로즈 팀의 오제 히로유키선수이다. 오제 히로유키의 41번 역시 애도하는 의미에서 2019년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김영신선수와는 다르게 오제 히로유키 선수는 입단 후 바로 1군 자리를 차지하였고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성장 중이었다. 그리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여담

김영신 선수의 얘기와 별개로 여담을 말하자면, OB베어스(두산베어스 포함)는 '포수사관학교'로 불린다. 역사를 통틀어서 쟁쟁한 포수가 많이 들어왔고 그의 여파로 경쟁에서 밀리는 선수도 많이 나타났다. 김경문과 조범현 뒤에는 정종현이라는 3번째 포수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벽을 뛰어넘기 너무 힘들었고, 1990년대에는 김태형과 이도형이 있었으며 그 뒤로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 등 많은 선수들이 영입되었다. 그리고 최기문과 진갑용은 홍성흔에게 밀리면서 각각 롯데자이언츠와 삼성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 이후에 빛을 보게 됐다. 또 양의지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바람에 백업으로 있던 최승환과 용덕한이 밀려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포수 자원은 드문 편이어서 포수 유망주의 영입에 각 구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선수층이 지극이 얇았던 1980년대 중반이었기에 포수 영입의 필요성은 더 강력했다. 2군 리그마저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그리고 당시에 트레이드는 구단이 선수에게 보복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수 입장에서는 내 고향, 내 직장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당시 시절에는 트레이드가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팀에 쓸모없는 존재라서 정리해고당하는 의미로 많이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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